고수의 생각법: 어디에나 적용되는
컴퓨터 알고리즘이 (아직) 사람을 넘어서지 못한 게임 바둑, 그 바둑의 고수 조훈현이 들려주는 생각법이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 정상급 프로 바둑기사에게서 어떤 바둑 교육을 받았는지, 타이틀을 건 대결을 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1등의 자리에 군림하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에게 지고 왕좌에서 내려올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한국과 일본의 바둑 스타일이 어떻게 다른지 등의 얘기를 들을 기회는 흔치 않다. 바둑이라는 주제는 낯설지만 그만큼 에피소드는 더 흥미롭다. 게다가 저자가 경험에서 이끌어내는 통찰은 바둑에 한정되지 않는 일반성을 가졌다. 책에서 공감이 가는 문구를 몇 개 골라봤다.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알고서 창의적인 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풀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번쩍 새로운 수가 떠오르는 것이다. 프로 기사들이 초읽기에 몰린 순간에도 기발한 묘수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평소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39p
어떤 해결책이 가진 창의성은 애초에 그 창의성 자체가 목적이었을 리는 없고, 뛰어난 해결책이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는 속성이 아닐까 싶다. 기존의 방법으로는 안 풀리니까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고, 그걸 우아하게 잘 해결했다면 기존에는 없던 방법일 수밖에 없으니까.
승부의 세계에서 이기는 자가 강한 자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바둑에는 실력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것은 새로운 ‘류’의 충돌이다. 나의 류와 이창호의 류는 너무나 달랐다. 아니, 이창호의 류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류였다. 바둑이라는 진리를 깨우치는 데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창호와 나는 전혀 다른 경로로 그 길을 올라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기사들은 물론 나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나의 허점을 창호만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95p
공부를 할 때에도 이해하는 방식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특정한 맥락에서 이해해왔던 개념을 다른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걸 보고 머리가 깨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바둑에서 조훈현, 이창호 같은 천재가 새로운 ‘류’를 만들어내듯이 내가 공부하고 일하는 분야에서는 또 다른 천재들이 새로운 방법론과 개념을 만들고 있다. 보통 사람으로서 새로운 것을 만들기는 커녕 천재들의 행보를 따라가기도 벅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추종이 아니라 곱씹고 소화해서 자기만의 스타일로 녹여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기존의 방식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다.
수읽기는 많이 알면 알수록 유리하다. 수읽기는 직관과 경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지식이 많아야 한다., 160p
알지만 안 쓰는 것과 몰라서 못 쓰는 것은 다르다. 예전에 공부하면서 과연 내가 쓸 일이 있을까 했던 것이, 최근에 고민하던 문제에 딱 맞는 해결책이라는 걸 깨닫고 뿌듯했던 순간이 있다. 문제의 맥락에 맞지 않는 지식을 무작정 우겨넣으려 해도 안 되지만, 나중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르는 다양한 지식을 기억에 색인해놓는 것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복기”에 대한 내용이다. 복기란 바둑을 그대로 다시 둔다는 건데, 프로 기사들은 대국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복기를 한다고 한다. 치열한 승부가 끝난 직후에 당사자들끼리!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복기는 낯설고 다소 낭만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머리를 마주하고 대국 내용을 되짚어본다니, 멋지지 않은가. 하지만 멋진 것도 없다. 우리가 복기를 하는 이유는 예의이기도 하지만, 그 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패자는 어떻게든 자기가 패한 원인을 알아내야 한다. 집에 가서 혼자 끙끙거리는 것보다는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훨씬 간단하다., 172p
이때 어디서 승부가 갈렸는지, 다르게 뒀으면 그 후로 어떻게 진행됐을지 함께 토론한다고 한다.
복기가 중요한 것은 이처럼 대국 후의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아이디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전혀 몰랐던 것,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상대방을 통해 알게 된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경험이다., 178p
이것도 정말 공감이 된다.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해서 만든 해결책을 뛰어난 사람에게 진지하게 비판받고, 거기에 반박하거나 아니면 가다듬어서 다시 토론한 적이 있는데,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이 배우고 성장하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다른 부분에서 나오지만 프로 바둑기사가 될 정도면 이미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이고, 설사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해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르쳐주는” 관계는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방금 둔 대국을 놓고 일종의 케이스 스터디를 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배우는 문화가 바로 복기인 것 같다. 대학원에서는 논문 세미나를 하고, 회사에서도 주기적으로 혹은 프로젝트가 끝나면 회고를 하는데, 바둑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다고 해서 신기하고 또 반가웠다.
바둑 이야기지만 바둑 이야기만은 아닌 책, 각 에피소드의 교훈은 뻔하지만 그 중간 과정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성찰과 통찰에서 배울거리가 많은 책이다.
노란 형광펜
- 실수는 우연이 아니다. 실수를 한다는 건 내 안에 그런 어설픔과 미숙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75p
- 그날 둔 바둑은 현재의 내 실력과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잘못된 게 있으면 지금 고치고 넘어가야 한다., 184p
- 복기를 통해 패착을 밝혀내고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길을 찾아내면 그 자체로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18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