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의 대통령 길들이기
나는 동일 저자의 책을 여러 권 읽기를 웬만하면 피하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책을 살피다가 재미난 사실을 깨달았다. 관심있게 읽었던 책들의 번역자가 겹치는 것이다. 『위험한 경영학』과 『생각 조종자들』에는 한겨레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인 이현숙 씨가 공역자로 이름을 올렸고, 이번에 서울 시장 보궐 선거를 맞이하여 읽은 『마이클 무어의 대통령 길들이기』를 옮긴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번역한 최지향 씨다. 번역자의 책 고르는 취향이 일종의 필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니 레이싱모델 최지향 씨만 나오네;;;
『Mike’s Election Guide 2008』이라는 원제가 『마이클 무어의 대통령 길들이기: 삼류정치에 우아하게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로 바뀌고, 본문이 국내 실정에 맞추어 편집된 사연은 이글에서 확인하자.
미국 정치에 대한 환상?
책의 첫느낌은 한 마디로 이거다.
‘아니, 이게 진짜 미국 이야기야? 한국 아니고?’
먼저 대통령(당시 부시)부터 살펴볼까? 아래 구절 인용이면 충분할 듯싶다.
TV, 영화와 달리 코미디언 같은 대통령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현실은 비극이 된다. (중략) 1,8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는 정부의 늑장 대처로 입지 않을 피해를 입었는데도, 위대하신 그분은 재난관리청장에게 “잘하고 있어”라고 칭찬하며 녹슬지 않은 개그 감각을 선보였다. 당시 재난관리청장은 재난관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국제아랍말협회’ 회장 출신으로 대통령이 선거 때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뽑아놓은 사람이었다., 7p
뿐만 아니라 이른바 보수 세력의 부자 감세, 복지 축소, 공공 서비스 민영화 정책이 그렇고, 그들의 선거 전략이 또 그렇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모습은 약간 현지화를 거치긴 했지만 여전히 비슷한 데가 있고, 오바마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에 이르러서는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미국 정치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준다고 할까. 심지어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는 언론에서조차도 무어는 문제를 찾아낸다. (77p) (물론 마이클 무어가 골수 민주당 지지자라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웃음의 코드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고 해도, 공개되면 경천동지할 진실이라고 해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그런데도 가시적인 변화가 없으면 사람들은 지치게 된다. 무력감과 피로감에 결국은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웃음이다. 달리 말하면, 풍자와 조롱.
군대를 응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습니다. 자동차 뒤에다가 ‘군대를 지지합니다’ 라고 적힌 자석 리본을 붙이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성조기를 꼽고 다니는 게 좋을까요?
라는 질문에
바그다드에 파병된 군인들이 조국의 국민들이 “아기가 타고 있어요” 스티커 옆에 ‘군대 지지’ 리본을 붙이고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중략)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전신이 마비된 군인들이 생쥐가 득실대는 월터 리드 육군 병원 병실에 누워 창박을 바라보다가, 저 멀리 커다란 노란 리본을 붙인 벤츠가 셰비 체이스 쇼핑센터를 향하는 장면을 보면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올 것입니다.
라고 답하는 걸 보면 저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비꼬는 재주가 탁월한 것 같다. 어렵고 딱딱하지만 중요한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냄으로서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쓴다.
가볍기만 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던지는 문제 의식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거기서 만큼은 무어도 시크한 모습을 버리고 열변을 토한다. 2장 “내가 대통령이 되면 세상은 이렇게 바뀐다”를 보면, 프랑스와 비교하여 약간 낮은 명목 세율에 비해 처참할 정도로 엉망인 공공 서비스를 비판하고, 정부 지원 건강보험 제도가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미국이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진단하여 진정한 세계의 친구가 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면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이자 마지막 장의 제목이기도 한 “대통령을 길들이는 방법”에 대한 무어의 답은 무엇일까?
자신과 친구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불법적인 전쟁을 벌이려는 미래의 대통령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인가? 무고한 사람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미래의 대통령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누군가 그를 진정시키며 “자, 봐라. 몇십 년 전 부시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내 주장의 핵심은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무시하고 기만하고 착취하는 최고 통수권자의 등장을 막자는 것이다. 과거의 대통령에게 엄격하게 책임을 묻는 것은 미래의 대통령을 길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228p
더 이상의 코멘트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삼류정치에 우아하게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되짚어보며 글을 마치기로 하자.
- 정치인이 국민을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기는 잠시 미루고, 유머 감각을 유지할 것
- 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
- 그러기 위해 투표에 꼭 참여하되 뽑을 만한 사람을 뽑을 것
노란 형광펜
- 어떤 기자가 대통령에게 이렇게 대놓고 질문하는 장면을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요? “대통령님, 조금 전에 하신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 같습니다. 방금 하신 말이 취임 후에 지금까지 했던 수많은 거짓말과 다르다는 점을 증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100 ~ 101p
- 정말 나라에 필요한 전쟁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자들이 자녀를 전쟁터로 보내는가, 안 보내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123p
-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일하고도,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것만 빼고는 미국은 꽤 괜찮은 나라다., 13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