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든 투자 아이디어: 금융 투자 이론의 역사
저명한 투자 자문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피터 번스타인은 이 책에서 주식 투자가 어떻게 학문의 대상이 되었는지, 상아탑의 이론이 어떻게 실제 금융 현장에 투입되었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한 마디로 투자 이론의 역사인데, 이론뿐만 아니라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이 분야로 뛰어들게 된 계기나 이론이 탄생하기까지 여러 학자가 상호작용하는 과정도 볼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다. (원제 Capital Ideas: The Improbable Origins of Modern Wall Street)
주가를 예측할 수 있을까?
뜸들이지 않고 1장에서 바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처음으로 주식 시장을 학문적으로 분석한 루이 바슐리에의 연구나 코울스의 정량적 분석 작업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명확한 것 같다.
“시세 예측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러면 남은 400페이지에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 주가를 예측하지는 못해도 이론적인 최고의 포트폴리오를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 주가를 예측하지는 못해도 예측할 수 없는 원인을 분석할 수는 있지 않을까?
- 주가를 예측하지는 못해도 증권의 정확한 가치를 평가할 수는 있지 않을까?
- 주가를 예측하지는 못해도 위의 연구 결과를 실제 투자에 적용할 수는 있지 않을까?
남은 내용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다.
최고의 포트폴리오를 구하다.
여정은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Modern Portfolio Theory)으로부터 시작된다.
그(=해리 마코위츠)는 학생으로서 ‘한 인간이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트레이드 오프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와 같은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중략) 투자자가 수익을 극대화하면서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 마코위츠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79p
마코위츠는 투자에서의 위험(risk)을 정의하고, 위험과 기대수익으로부터 최선의 포트폴리오를 꾸리는 방법에 관한 이론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그 모델이 실무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계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토빈의 분리정리가 나와서 약점을 보완하고, 마코위츠의 제자인 윌리엄 샤프가 계산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단일지수모델을 개발함으로써 이론은 점차 단단해진다.
이 모든 과정이 책에 잘 그려져 있다. 어려운 수식을 쓰지 않으면서도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기여한 부분, 그 이론의 의미와 한계를 쉬운 말로 짚어준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깊이 알고 싶으면 그 키워드를 가지고 논문이나 교과서를 찾아보면 되니까.
가격의 예측 가능성을 탐구하다.
주가 예측 불가능이라는 선구자들이 결론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분석의 전통을 이어받아 많은 학자들이 시간에 따른 가격 그래프를 들여다 보았다. (선행연구가 누적되면 그 결과를 보고 더 발전시키는 식의 순차적인 역사가 아니었다. 연구자들은 서로의/선배의 작업을 전혀 모른 채 홀로 연구했다가 나중에 비슷한 결과를 우연히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통계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시기이기도 한데, 그때 그들에게는 주가 예측이 목적이 아니라 시계열 분석이 목적이고 주식 그래프는 그저 데이터 소스에 불과했다는 게 재미있다.
가상의 랜덤워크 그래프를 만들어 가격 그래프와 비교해 본다거나 트렌드를 좇는 매매기법을 시뮬레이션해서 전략의 효과를 실증하는 등의 얘기도 나온다. (투자 이론가와 현장 실무자 간의 갈등의 기미가 솔솔)
해리 로버츠는 주가의 흐름을 그래프로 만들어 미래의 주가를 예측하려고 하는 이른바 차티스트들에게 주가를 예측하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오늘날 그들은 ‘기술적 분석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린다., 160p
가격을 순수하게 통계적인 관점만 가지고 분석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경제학적인 시선. 경제학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다. 폴 새뮤얼슨은 가격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재 가격(=가치)을 반영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는 시장의 모든 정보는 즉각적으로 주가에 반영된다는 유진 파머의 효율적 시장가설로 발전된다.
샤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정 시점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반영한다. … 따라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파머의 논지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검증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금융 현장의 플레이어들에게 상당히 혁명적인 주장으로 들린다.”, 211p
최근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행태주의 금융이론(행동경제학)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 책에서는 그냥 그런 게 있다는 수준으로 소개하는 데 그친다.
증권의 가치를 계산하다.
한쪽에서 차트를 붙들고 씨름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증권의 내재 가치를 직접 계산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가치 투자의 대명사가 된 벤자민 그레이엄이나 그의 제자 워렌 버핏이 따지면 이쪽에 속하겠지만, 저자가 보기에 그들의 방법은 이론이라기보다는 원칙에 가깝다. 책에서 이론으로 소개하는 것은 모딜리아니-밀러(MM) 모델, ‘케펨’이라고 읽는 CAPM(Capital Asset Pricing Model, 자본자산 가격결정 모델), 블랙-숄즈-머튼의 옵션가격 결정 모델이다. 특히 옵션 모델을 읽으면서 흔히들 위험하다고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하는 옵션이 사실은 위험을 통제할 목적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라고 느꼈다.
금융 현장에 이론을 도입하다.
성숙한 이론의 귀착지는 바로 현장이다. 마지막 주제는 1960 ~ 1980년대에 벌어진 상아탑 이론의 실무 투입 역사다. 기존 세력의 저항과 첫시도에서는 불가피한 시행착오를 넘어서 역사상 첫 인덱스 펀드가 탄생하고, 컴퓨터의 강력한 성능에 힘입은 체계적인 위험 관리가 기본으로 자리 잡기까지의 이야기가 시원하지만 조금은 혼란스럽게 이어진다. (인물 관계나 시간 순서가 좀 헷갈린다.)
이제는 이론가들이 직접 회사를 차려서 현업에 뛰어드는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스토리의 끝이 해피엔딩은 아니다. 번스타인은 긴 역사의 마지막을 현실이 수학 이론의 가정을 벗어난 순간 도래한 처참한 현장으로 장식했다.
그럼에도 이론의 가치에 대한 그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다. 시장은 여전히 학자들의 통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랜덤 괴물’을 통제하기 위한 그들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노란 형광펜
- 우리 둘(=저자와 윌리엄 샤프) 사이에 피어난 논쟁적인 분위기에 취해 나도 이론가들이 자산운용이라는 예술을 이해하기도 힘든 수학 공식으로 치환하는 것에 대해 평소 갖고 있던 반감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129p (그런 반감을 갖는 사람이 자산운용가뿐일까?)
- 그(=폴 새뮤얼슨)가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알게 된 시기가 바로 시카고 대학교 학부 시절이었다. “경제학 교재를 처음 읽은 기분은 왕자의 키스를 받은 숲속의 잠자는 공주의 느낌과 같았다. …탁월한 가설, 정리, 법칙 등이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학문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179p
- 켄들이 주가가 ‘우연이라는 악마’에 의해 결정되는 우연한 숫자일 뿐이라고 발표했다가 학회에서 집단적인 공격을 받았다는 하우새커의 설명을 들은 새뮤얼슨은 순간 전율했다. (중략) “과거와 현재의 가격으로 미래의 가격을 예측할 수 없다는 논리는 경쟁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측면에서 경제법칙의 실패가 아니라 승리라고 할 수 있잖아.”, 185p (같은 현상을 경제학의 관점으로 보니 이렇게 해석되는구나!)
- 효율적인 시장이 꼭 합리적인 시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13p
- 트레이너도 정태적인 캐펨을 동태적인 모델로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수학에 뛰어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결국 모딜리아니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는 그 연구를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머튼은 트레이너와 달리 수학에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1969년 봄 그는 이토의 보조정리와 기타 수학적 모델을 활용해 연속 시간대에서 투자자가 어떻게 포트폴리오를 선택하는지를 규명해 냈다., 334p (역시 수학은 잘 하고 봐야..)
- 맹렬하면서도 현명하게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투자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다. 다행히도 현실 시장에는 게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어느 누가 더 많은 수익을 얻을 기회가 종종 발생한다. 빈번하지는 않지만 비효율적인 순간 덕분에 증권시장에서 게임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25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