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된 기술 용어

최근에 인터넷에서 읽은 내용 중에서 가장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인문학이라는 제국의 언어라는 글이 있다. 인상적인 부분을 인용하자면,

번역 없이 사용해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고 있다. ‘사유하지 말자’는 것이다. (중략)

먼저 ‘사유하지 말자’는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그 용어를 하나의 고유명사로 취급한다는 말이고, 고유 명사로 취급하는 한, 이 용어는 그냥 수용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중략)

사유가 가능한 것은 고유명사에 대해서가 아니다. 물론 고유명사를 사용한 사유는 가능하다. 그러나 jouissance가 ‘즐김’이나 ‘향유’로 번역되지 않고 단순히 ‘주이상스’라 적힐 때, 여기가 사유의 한계가 규정되는 곳이다. 이 말, 개념 자체에 대한 사유는 불허된다. ‘주이상스’는 더 이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할 무엇이다. ([출처] 인문학이라는 제국의 언어 1|작성자 borderland)

분야가 다르고, 또 고유명사는 아니지만, 나도 일을 할 때 영어로 된 단어를 많이 쓴다. 쿼리, 랭킹, Feature, Smoothing, Posterior, Prior, Likelihood, Regression 같은 것인데, 영어 소리나는 대로 한글로 쓰는 게 일반화된 경우도 있고, 번역어가 있지만 어렵거나 와닿지 않아서 잘 안 쓰는 경우도 있다. Likelihood는 우도, Regression은 회귀라고 하는데, 이 한자어 또한 익숙한 일상어는 아니기에 입에 달라붙지 않는다. Posterior와 Prior에 해당하는 사후(확률), 사전(확률)도 마찬가지. Feature처럼 약간 일반적인 단어는 그냥 피처라고 부르기도 하고 요소/자질로 고쳐쓰기도 한다. 동료와 얘기할 때 이런 용어를 원어 그대로 쓰면 맥락이 분명해져서 의사소통의 효율이 높아진다는 장점도 있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그런데 쿼리(Query)같은 용어는 조금 특별한 면이 있다. IT 쪽에서는 보통 데이터베이스를 조작하는 SQL 구문 혹은 사용자가 검색창에 입력하는 검색어/질의어를 뜻하는데, 이 단어를 -영어 공부할 때가 아니라- 전산을 공부할 때 처음 만났던 나는 쿼리라고 하면 이런 기술적인 의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어 사전에는 분명히 의문, 질문, 문의, 조회라고 나와 있으며,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처음에 받아들인 용례에 생각이 갇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반면에 “쿼리” 대신 “질의어”라고 하면, 물론 이것도 쉬운 단어는 아니지만, 질의라는 단어와 관련해서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이 배경으로 깔리는 것 같다. “모르는 게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고 했을 때 머리속에 떠오르는 상황이나 문맥 같은 것들. 쿼리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무엇인지 모른 채 “이런 걸 쿼리라고 부른다”고 주입받는 경우와, 쿼리에 해당하는 모국어가 무엇인지 알고 더 나아가 “쿼리”를 “질의”로 대체해서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해보자. 혹시 후자가 “정보를 물어보는 게 검색인데 왜 키워드, 아니 단어 중심으로 입력해야 하지? 자연어로 하면 안 되나?” 하는 식으로 생각을 펼쳐나가기 수월하지는 않을까?

모르겠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얼마 전에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를 읽으면서 배웠다. 근거없이 함부로 내지르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나 지금은 논문을 쓰는 것도,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용감하게 계속 질러보자. 대학원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유니스 명령줄 인터페이스(Command Line Interface)는 “동사 + 목적어” 형식이지? 가령, 파일A를 경로B로 복사하려면, “cp 파일A 경로B”라고 입력해야 한다. 혹시 영어에서 명령문이 동사로 시작하기 것과 관련있지 않을까? 만약 “주어 목적어 동사” 순서로 말하는 한국 사람이 발명했다면, “파일A 경로B 복사” 이런 식의, 객체지향(?) 명령 형식을 시도하지는 않았을까? 석사 학위논문 주제였던 K-Menu 인터페이스는 사실 이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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