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유럽은 경제학자들에게 있어 무척 낭만적인 공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 거의 경제학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대부, 애덤 스미스
- 최고의 친구이자 논쟁 상대였던 토머스 맬서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 정치학사와 철학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경제학사에까지 등장하는, 조기교육의 희생자이자 수혜자인 존 스튜어트 밀
- 20세기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로 빠지지 않지만 정작 동시대에 살았던 밀은 그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카를 마르크스
그 다음부터는 고등학교 경제학 시간에 좀 더 들어봤다 싶은 용어와 인물들이 나옵니다.
- 수요와 공급, 한계적으로 유명한 앨프레드 마셜
- 마셜의 제자이자 천재, 존 메이너드 케인스
- 케인스주의의 대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통화주의를 창시해낸 밀턴 프리드먼
- 경제학이 다루는 영역의 범위를 정치나 제도로 넓힌 제도학파와 뷰캐넌 (솔직히 말하면 뷰캐넌이나 베블런, 갤브레이스라는 이름은 이 책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 가장 매력적으로 들리는 이론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느낌도 드는 합리적 기대학파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책 속에서는 이들 경제학자의 인생과 그들의 이론이 현란하게 펼쳐집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의 입문서에요.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누가 소프트웨어의 심장을 만들었는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이런 식의 책들.
딱딱한 경제학 교과서보다는 이런 책을 먼저 학생들에게 읽히면 어떨까 싶습니다. 경제학, 아니 무슨 무슨 학이라고 불리는 모든 분야에 대해서 왠지 거리감 느껴지는 교과서 대신, 도대체 그게 뭐하는 학문인지, 그걸 연구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왜 했는지를, 당시의 개인적/사회적 상황과 연관지어 들려주면 배우는 사람도 스스로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요? 위대한 학자들도 결국은 그 어려운 학문 속에서 나름의 재미를 느꼈기에 평생에 걸쳐 연구를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저도 정작 고등학교 다닐 때는 선택과목으로 경제 대신 사회문화를 택했습니다. 그게 더 재밌어 보였거든요. 성인이 된 뒤에 읽은 몇몇 경제교양서를 만약 그때 읽었다면 어쩌면 제 전공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
저자인 토드 부크홀츠가 일부러 이렇게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경제학자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보입니다. 우선 대부분이 생전에 자기 이론이 인정받아 주류경제학으로 편입되는 것을 지켜봤고, 또 정부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무척 행복했겠죠. 순수과학 같은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사회과학이나 공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내 연구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만큼 큰 동기부여가 또 있을까요?
많은 경제학자가 영국 출신이라는 점도 눈에 띕니다. 단순히 국적만 같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서로서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맬서스-리카르도 사이의 논쟁, 마셜에게 경제학을 배운 케인스 등등.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하는 거인도 없지는 않겠지만, 보통은 이런 사회적 배경과 풍토가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학문이든 문화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되새겨 봅니다.
이 책을 읽은 뒤에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이라는, 주제만 경제학이 클래식 음악으로 바뀔 뿐 형식은 비슷한 책을 읽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책에서는 영국인이 한 명도 등장하질 않더군요 :) 대신 유럽의 작곡가들 사이의 또 다른 사회적 연결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학의 흐름이라는 큰 그림을 잡고 싶어서 통독한 탓에 각 학파의 주장을 꼼꼼하게 다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책을 한 번 더 천천히 책을 읽어봐야겠죠. 하지만, 그런 속독의 와중에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경제학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밀턴 프리드먼인데요, 케인스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에 경제학을 시작했지만, 특유의 끈질김과 치밀함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채워서 결국 주류경제학의 대세를 바꿔버린 인물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책에 실려 있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징병제를 둘러싼 이야기인데,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본 사람이라면 그 주인공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이렇듯 이름만 많이 들어본 경제학자들의 삶과 이론을 쉽게 설명해주는 좋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번역까지는 잘 모르겠고 오타가 좀 많이 보입니다. 구슬을 구술, 드러나다를 들어나다, 심지어 십상이다를 쉽상이다라고 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오탈자가 몇 번 눈에 들어오니까 책을 읽는 내내 계속 신경이 쓰이고 집중도가 떨어졌습니다. 힘들여 글을 옮겼을 역자에게는 사소한 트집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고객의 평가란 원래 이렇게 냉혹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책이 이미 개정판인데, 개정판의 개정판에서는 꼭 오탈자가 모두 수정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