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학의 피카소는 누구일까: 통계학자 열전
경제학에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통계학에는 이 책이 있다. 통계학 박사인 저자는 20세기 통계학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의 면면과 그들의 연구를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소개한다. 수학적 표기는 완전히 배제하고, 각각의 연구가 나온 배경과 맥락, 의의를 쉬운 말로 풀어주는데, 현실 속 문제와의 씨름에서 확률과 통계 분포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발견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다고 통계학 교과서에 나오는 어려운 개념과 정리를 이해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왜 중요하고, 어떤 과정에서 도출되었는지 막연하나마 손에 잡힐 듯한 큰 그림은 갖게될 것이다. 내 생각에는 통계학 개론 수업을 들으면서 도대체 이게 뭐냐, 왜 배워야 하냐며 푸념하는 사람이 읽으면 가장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불멸의 이론』과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이 책에서 베이즈이론을 다룬 장은 하나뿐이다. 13장 “베이즈정리에 기반을 둔 이단적 통계학”. 역시나 이단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지만 그래도 정해져 있는 어떤 모수가 존재한다는 관점과, 모수 자체가 임의적이며 그 확률분포를 계산한다는 관점 사이에는 넓고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두 책을 비교하라면, 피카소의 손을 들어주겠다. 똑같이 통계학자 열전 형식이지만, 불멸은 정작 이론에 대한 설명은 부실하고, 편향섞인 핍박과 역전의 드라마만 강조하는 느낌인 반면 피카소는 적절한 이론 설명을 통해서 통계학의 의미와 재미를 알려줄 뿐 아니라 추가적인 공부 욕구까지 불러일으킨다.
번역 불만?
검색해보니 번역서 제목에 대한 불만이 보인다. 원제는 “The Lady Tasting Tea: How Statistics Revolutionized Science in the Twentieth Century” 직역하면, “차 맛을 가리는 여인: 통계학은 어떻게 20세기 과학에 혁명을 일으켰는가” 정도가 될 것 같다. 번역서의 제목은 “통계학의 피카소는 누구일까? 20세기 과학혁명을 이끈 통계학 영웅들의 이야기” 내가 보기엔 원서도 어느 정도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기획한, 소설로 착각할 만한 제목이고, 번역서는 그런 의도에 충실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존 튜키(John Tukey)에 대한 책으로 오해할 여지는 있지만 말이다.
사실 번역자에 대한 불만은 다른 데 있다. 대중서인 만큼 학술용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은 좋은데, 최소한 그 용어가 처음 등장할 때, 원명이 무엇인지 써줘야 하는 것 아닐까? “사영추적”, “운용 연구”라고 옮긴 걸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이것의 원어가 “Projection Pursuit”, “Operation Research”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기운분포”, “개인적 확률”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외에는 딱히 번역이 부자연스럽거나 거슬리지 않았다.
노란 형광펜
- 베이즈방법을 설명할 때 마주치는 어려움은 베이즈방법을 여러 가지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과 적어도 두 가지 철학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다른 것들에게 같은 이름은 붙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146p
- 굳은 수학 퀴즈를 무척 좋아했는데, 특이하게도 답을 먼저 보고 퀴즈 푸는 것을 즐겼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 하는 문제라도 답을 먼저 보면 어떤 계산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은 답보다 이를 일반화하는 것에 더 흥미가 있었다., 236p (공부 잘하는 애들은 끝까지 답을 안 보고 자기 힘으로 푼다고들 하는데, 과연 천재의 발상은 애초에 차원이 다르구나 싶다)
- 그는 특정 분포를 가정하지 않고도 자료의 분포를 검토할 수 있음을 인식한 튜키는 이 문제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마침내는 탐색적 자료분석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책을 출판했다., 248p (그냥 자료 시각화 방법 정도로만 여겼던 EDA의 탄생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다)
- 피스톤은 둥글게 제작해야 한다는 말은 특정 피스톤이 둥근지 아닌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없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품질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고, 품질을 특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품질과 관련한 특성을 정의해야 한다., 267p (최근에 들은 얘기랑 비슷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공감가는 주장이다)
- 나는 철학은 철학자라는 이상한 사람들이 하는 비밀스러운 학문적 활동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철학은 일상적인 생각과 행동 뒤에 있는 가정을 찾는 것이다. 문화를 통해서 갖게 되는 세계관은 몇몇 가정으로부터 형성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철학적 연구는 바로 이 가정을 찾고 그 타당성을 조사하는 것이다., 312p (철학에 대한 정의는 다양할 테지만, 참 와닿는 설명이다. 특히 수학 모형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일을 하는 입장에서 가정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