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의 인생론
말을 하는 일에 소질이 없는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경계도 하는데, 대표적인 두 가지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너무 달변인 나머지 지나치게 말이 많아서 내용이 명료하지 않거나 핵심을 파악하기 힘든 경우. 둘째, 어떤 현상에 대해서든 막힘없이 말을 풀어내지만 서로 다른 상황에서 한 말들을 모아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경우. 즉,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설명과 주장을 내놓는 것인데, 깊은 사유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사고의 틀 없이 대충 아는 것들을 적당히 버무리다 보면 이런 실수를 하기 쉽다. 한 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앞으로 그 사람이 아무리 그럴듯한 얘기를 하더라도 신뢰를 주기 어렵다.
그의 이번 책을 읽다 보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여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의 원칙을 모순없이 굳건하게 세우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보통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자살에 대해서도 무조건 비판하거나 섣불리 옹호하는 대신 다양한 사례들을 먼저 살핀다. 그리고 삶 못지않게 죽음도 존엄해야 하며,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과 견해를 이끌어낸다. 자신이 어떻게 죽기를 바라는지를 생각해봄으로써 유한한 인생에서 소중한 게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한다.
그의 성찰 중에서 특히 와닿았던 부분은 끊임없는 객관화의 노력이다. 나이가 든 이후 젊었을 때와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갖게 된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를 고민하고, 자신이라고 예외라는 보장이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따져보고 다짐한다. 이른바 ‘대선 멘붕’이나 세대 정치 갈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본인의 기대나 실망과는 별도로 객관적인 판단을 잃지 않는다. 오늘의 50대가 2002년 선거에서 누구를 더 지지했는지, 1987년에 거리로 나왔던 당시 20대는 누구였는지 상기시킨다. 나이가 들면서 생물학적으로 보수화되는 “보편적” 현상에서 지금 젊은이들을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지만, 냉정한 현실 인식 하에서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런 토대에 따라 본인의 과거와 현재 삶을 돌아보며 인생, 교육, 사회, 정치에 대한 의견을 차분하게 적어나간 저자의 인생론이다.
저자 유시민은 스스로를 ‘먹물’, ‘지식소매상’이라 칭한다. 자기 인생론을 만들기 위해 책을 찾아보고 공부하는 데서도 ‘먹물’ 근성을 발견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식’은? 이번 책은 성격상 새로운 지식은 별로 담지 않았지만, 그가 최근에 관심을 둔 주제는 생물/진화/뇌과학인 듯싶다. 책 속 논의의 근거도 그렇고, 참고문헌 목록을 봐도 그렇다. (별로 마음에 드는 분류는 아니지만) 문과/이과 중에서 고르라면 문과에 속할 저자가 이런 과학 분야를 공부하고, 이를 통해 개인/사회 현상을 바라보고 글을 쓰는 것이 반갑다. 앞으로 정치인이 아닌 자유인 지식소매상으로서 그가 내놓을 책이 기대되는 이유가 하나 늘었다.
개인적인 이야기
최근에 개인적인 변화와 주변 환경의 변화가 한꺼번에 찾아와서 좀 지쳐 있었다.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던 차에 저자 이름과 제목만 보고 그냥 책을 구입해서 이틀 내내 붙들고 틈날 때마다 읽었다. 책의 캐치프라이즈(?)인 “힐링에서 스탱딩으로”는 매우 적절한 소개말이라고 생각한다. 대책 없이 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로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당신 스스로 땅 위에 발을 굳게 디디고 일어서라는 메시지를 직간접적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일과 놀이, 사랑과 연대. 저자가 말하는 인생에서 중요한 4가지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계획하는 좋은 틀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쓰러져 있어야 할 때도 있지만, 이제 치유가 좀 되었으니 일어나 반성을 해볼까?
저자는 개인의 삶이라는 커다란 화두를 얘기했지만, 그가 말한 아이디어들은 우리 일상에서의 의사결정에서도 참고할 여지가 많다. 죽음, 특히 자살에 대한 논의에서 저자는 개인이 삶에 부여하는 의미와 자기 결정권의 중요성을 들고 나온다. 내가 하는 일, 소속된 집단 등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에 대해서 이런 요소를 평가해보면 어떨까? 또, 신념을 평가하기 위해서 ‘그 신념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훌륭하게 만들어주는가’라는 기준을 제시하는데, 우리가 만나서 어울리는 사람들을 이 기준에 따라서 보면 어떨까? 훌륭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 꼭 잘 나서 내게 뭔가를 가르쳐준다는 뜻은 아니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내가 소중하게 느껴지고 의욕이 샘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트레스를 주거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게 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라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잘 나고 훌륭하더라도 나에게는 좋은 이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술술 읽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고민과 화두를 자기 삶에 옮겨와서 적용하고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에겐 울림이 있을 것만 같은 책이다.
노란 형광펜
- 모르면 자료를 조사하는 ‘먹물’의 습관에 따라 근자에 대유행하고 있는 뇌과학 관련 진화심리학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놀랍게도 인간 일반과 내 자신을 이해하는 데 철학서를 비롯한 인문학 책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었다., 100p
- 나도 더 나이를 먹으면 정치와 역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딸 아들과 손녀 손자들이 좋아하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다. 언제나 정치적으로 청년들의 편에 설 것이다. 그것이 유권자로서 품격 있게 나이를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232p
- 신념은 훌륭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훌륭해야 한다. 나는 내가 가진 신념 덕분에 내 자신과 내 삶이 더 훌륭해지는지를 주의 깊게 살핀다. 내 자신을 비루하게 만드는 신념은 좋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27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