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위한 물리학: 정책 의사결정을 돕는 과학
이 책의 독후감은 저자인 리처드 뮬러 교수가 자랑스럽게 들려주는 그의 학생의 일화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리즈라는 학생이 어떤 물리학자와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의 일이라고 한다.
(중략) 리즈는 이렇게 말했다. “태양광발전도 전망이 있죠”
“하!” 그 물리학자가 비웃듯이 말했다. “만약 캘리포니아 주에서 쓸 필요한 전력을 충당하려면 주 전체를 태양전지로 도배해야 할 겁니다”
리즈는 바로 대답했다고 한다. “아뇨, 선생님이 틀린 거 같은데요. 1제곱km의 태양광에는 1GW 정도의 에너지가 있고 그건 원자력 발전소 하나랑 맞먹는 양이에요.”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는 살짝 인상을 쓰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음… 당신 말이 틀린 것 같진 않군요. 물론 지금 태양전지는 효율이 15% 정도밖에 안 되긴 하지만… 그건 그다지 크게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아요. 음.” 그리고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89p
짧은 대화 속에 이 책의 메시지가 아주 잘 드러나 있다. 바로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말고,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주장하자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과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원제: Physics for Future Presidents: The Science Behind the Headlines)은 그중에서도 특히 장차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가 되려는 사람이 갖춰야 할 과학적 자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책임있는 결정을 내리려면 우선 잘못된 권위나 미신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또한 상반된 주장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과학 지식은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도자에게는 입맛에 맞는 근거만 취사선별해서 사용하지 않고, 다른 가능성과 반론에도 귀를 여는 건강한 회의 능력과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바로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이 책은 인류의 안녕과 번영을 이끌어야 하는 미국(…)의 대통령을 위한 지침서답게 테러리즘, 에너지, 원자력, 우주, 지구온난화 이렇게 다섯 가지 분야를 다룬다. 미국 관점에서의 선정이기는 하지만 테러리즘을 안보로 바꾸고, 원자력을 북핵과 일본 후쿠시마 사태로 연결시키면 마냥 남의 일만도 아니다. 저자는 각각의 분야에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리학 지식을 설명하고, 널리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을 바로잡으며, 각종 이슈에 대해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잘못된 미신 타파
이름만으로도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탄저균 테러, 방사능 폭탄 등이 대표적인데, 저자는 이들에 대해 여태껏 과장되었던 부분을 지적하며 항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려 애쓴다. (과장되었다고 했지 위협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2001년 미국에서 탄저균이 포함된 편지가 배달되어 5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실제로 발생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5명에 그친(?) 것은 다르게 보면 대량 살상 도구로 탄저균을 이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라고 설명한다. 탄저균 테러가 성공하려면 균이 공기 중에 잘 섞여서 사람들에게 흡입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포자는 짧은 시간만에 바닥에 내려앉아버린다. 따라서 1 ~ 2g에 치사량의 수천만 배에 해당하는 탄저균이 들어있다는 것이 실제로 그만큼의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런 측면에서 과장이라는 얘기다.
방사능 폭탄은 폭발하면서 방사능 물질을 퍼뜨리기 때문에 위험하다. 여기에 대해서도 저자는 지극히 정량적으로 접근하는데, 방사능이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흔히 알려진 것만큼 대량 살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넓은 공간에 퍼질수록 단위 면적 당 방사능의 양은 줄어들고, 그만큼 인체에 끼치는 영향도 작아지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서의 파괴력은 사실 다른 폭탄도 마찬가지이므로 논외) 그러므로 탄저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방사능이라는 말에 우선 겁부터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테러 뿐만 아니라, 원자력 에너지의 위험성이나 지구 온난화의 문제, 또 전기 자동차가 상용화되지 않는 이유 등에 대해서도 저자는 과학자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을 과학자답게 말한다. 모든 것을 그렇게 정량화하는 게 옳으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과학만으로 모든 결정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좀 많이 고려하고 참고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테러에 관한 미지수 대부분은 과학적인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테러리스트들의 사고방식과 테러가 야기할 공포, 사람들의 반응, 확률과 위험도, 비용과 관계가 있다. 핵폭탄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방사능 폭탄이 얼마나 조악한지, 폭발물과 가솔린의 위험성, 생화학 테러가 위협적인 이유 등에서 과학적인 면도 함께 보는 적절한 감각이 필요하다. 정부는 국가의 여러 자원을 적절하게 배치해야 하며, 이런 일을 수행하는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기술 외적인 수많은 다른 이슈들과 연관되어 있다. 물리학 교수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을 맡기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과학 지식 함양
책에서 5가지 주제를 다룬다고 앞서 말했는데, 저자는 그 각각에 대한 물리학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저자 자신이 핵에너지 전문이다 보니 에너지, 원자력 얘기가 많고 또 그가 관여한 바 있는 온난화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기는 하다.) 그중에는 와트와 와트시의 차이, 원자폭탄의 특징과 제작법에 대한 설명처럼 유익하고 따분한 부분도 있지만, 신기하고 흥미로운 내용도 많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기껏해야 1마력 수준인 태양광 자동차는 한낱 취미가들을 위한 장난감에 불과하지만, 상용화된 태양 비행기도 있다. 태양 비행기를 개발하는 주요 목적은 분쟁 지역에서 급유 없이 정찰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중략) 가장 탁월한 것은 패스파인더라는 기종이다. 태양전지의 최대출력은 17마력으로 시속 20마일(32km/h) 정도의 느긋한 속도로 까마득히 높은 곳을 날아다닌다., 97 ~ 98p
또 흔히 묻는 경제학 질문. 우리는 언제까지 석유를 사용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물리학자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석탄에서 석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배럴당 60달러 정도를 쓸 수 있다면, 피셔-트롭시 공장을 갖고 있는 한 몇 세기가 지나더라도 그 가격에 살 수 있는 액체 연료가 바닥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04p
특별한 노력이나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법 없을까?
지붕이 하얀색이라면 대부분의 태양빛이 반사된다. 이렇게 하면 에어컨 비용이 많이 절약된다. (중략) 지붕은 어두운 색으로 칠하면서 동시에 태양빛의 절반 정도를 반사하는 기막힌 방법이 있다. 가시광 대신 적외선을 반사하는 페인트를 쓰는 거이다. 태양열의 절반 이상은 적외선이다., 385p
이밖에도 중력 측정을 통해 남극 빙하의 두께를 측정하고 크레이터나 땅굴을 발견하는 등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재미를 떠나서 대통령이 알고 있으면 좋은 법한 내용들 아닌가? 책에서 다루는 물리 내용은 이처럼 실용적인 것들이다.
이렇게 짧고 임팩트 있는 팁은 좋은데, 왜 복잡한 내용까지 알아야 할까? 이른바 불량국가의 핵위험을 제대로 판단해서 대처하려면, 핵무기의 종류와 각각의 특징, 제작 난이도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을 과소평가하거나 공포에 과민반응하기 십상이다. 또, 전세계적인 에너지 문제를 효과적으로 헤쳐나가려면 청정에너지의 장밋빛 환상에서 벗어나 각 방식의 경제성과 한계,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전략적 육성을 하더라도 거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비판 능력 증진
책의 마지막 주제는 지구 온난화다. 저자 역시 지구에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지만 섣불리 원인을 단정짓는 것은 경계한다. ((인간 행동이 온난화의 원인일 확률이 90% 뭐 그런 얘기가 나오는데 이건 좀 갸웃하게 된다. 주사위를 던졌을 때 3일 나올 확률이 1/6인 것과, 우리가 자연 현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100%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다른데, 확률이란 말로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느낌? 하지만 내용 흐름과는 상관없으므로 넘어간다.)) 그러면서 중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배웠던 온실효과 등을 설명하고, 온난화와 관련된 여러 사실 관계를 제시한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보다는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정보의 비판적 수용에 더 관심이 갔다. 그는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에서 과장 왜곡한 부분, 또 허리케인에 의한 피해액 그래프, 태풍 발생 건수 그래프에서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문제들을 지적하며, 과장되고 왜곡된 정보를 구별할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그게 사실 보통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검색엔진의 랭킹 품질을 평가할 때 정확도(Precision)만 보여주고 재현률(Recall)은 싹 빼버린다고 치자. 이렇게 하면 의도에 따라 결과를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다. 이쪽 분야를 아는 사람이라면 재현률은 어디 팔아먹었냐고 따지겠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결과를 받아보고 재현률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키 스틱 오류 사례에서도 드러나듯이, 사람은 자기 가설에 맞는 데이터를 보면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려는 인지 편향이 있다. 데이터를 왜곡하려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었다. 뮬러 교수도 나름 객관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려고 노력했겠지만 그가 핵에너지를 연구하는 교수인데, 이 책에서 에너지나 원자력을 다룰 때 그런 편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면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 상반대는 의견을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들어보고 최종 판단을 해야 한다. 그 일이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문제라면 중요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의사결정권자에게 과학 지식만이 아니라 과학적 회의주의나 건강한 비판 능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읽고 나서
읽는 동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책을 덮는 순간부터 우라늄 농축이 뭐였는지, 전기 자동차의 단점이 뭐였는지 가물가물 잊혀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과학 원리와 구체적인 수치를 기억해뒀다가 써먹으라고 하지만, 시험 보는 것도 아니고 또 관련 업계 종사자도 아닌데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이슈들에 대한 과학 지식이 쉽게 정리되어 있어서 필요할 때 다시 찾아 보면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주장을 접했을 때 과학자처럼 듣고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이 모든 의사결정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정계에 진출할 계획이 없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 과학적 지식과 사고방식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이 기회에 한 번 생각해보면 좋지 않을까?
노란 형광펜
- (물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은 종종 “수학이 아니라 물리를 생각하라”는 충고를 듣는다. (그렇지, 모델이나 수식에 매몰되면 안 되지.)
- 놀랍게도 우리는 구름의 형성에 대해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기후 시뮬레이션의 가장 큰 불확실성 요소가 된다. 구름은 매우 복잡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반사율도 고도와 두께에 따라 달라지는 데다 기류를 타고 이동한다. (중략) 이 모든 효과들이 너무도 복잡해서 아무리 좋은 컴퓨터를 사용하더라도 모든 것을 계산할 수는 없다., 322p
-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과학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그것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333p (그리고 말처럼 쉽지도 않다 ㅠ,ㅠ)
- 나는 대학원생일 때 발표나 논문에서는 항상 모든 근거-그것이 사실인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내 결론과 맞지 않는 사실 혹은 분석까지 포함한 모든 사실-를 제시해야 한다고 배웠다., 337p
- 하키 스틱의 원판이 등장한 논문에서 마이클 만은 주성분 분석, 혹은 PCA(principal component analysis)라고 불리는 표준 방식을 사용해서 70개의 기후 기록들에서 주요 특징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맥킨타이어와 맥키트릭은 마이클 만이 사용했던 프로그램을 분석한 결과, 중요 부분에서 심각한 문제를 찾아냈다., 356p (모든 연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 아닐까? 잠시 묵념..)